반년 동안의 출산 휴가를 마치고 오랜만에 나서는 출근길이라 마음부터 설렌다. 2년 전만 하더라도 나에게 결혼과 출산은 매우 어려운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10년 전, 농사짓는 어려운 형편에도 부모님은 나를 대학에 보내주셨고, 나는 그런 부모님의 짐을 덜어드리기 위해 4년 내내 학비와 용돈을 벌었다. 2학년을 마칠 무렵에는 아버지가 간암으로 쓰러지셨다. 학자금 융자를 쓰게 되었고, 졸업할 무렵에는 천만 원이 넘는 빚을 지고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지방대학 출신인데다 경제까지 어려운 상황이라 수십 통의 이력서를 보내 보았지만 연락이 온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지긋지긋 했던 아르바이트도 끝내고 싶어 비록 작은 회사고 월급이 적어도 안정적인 사무직 일자리를 찾았던 내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편의점, pc방, 주유소, 전단지 돌리는 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언제 짤릴지 모르는 불안 때문에 쥐꼬리 월급을 몇 달씩 늦게 주어도, 심지어는 성적인 모욕을 당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 고용·생계 불안한 비정규직 현실 -
그런 세월이 3년, 우연히 고등학교 때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는데, 자기는 전자제품을 만드는 공장에 다니는데 일만 열심히 하면 짤릴 걱정은 없고, 한 달에 150만 원 정도를 번다고 하였다.
한 번도 공장에서 일을 해볼 생각이 없던 나였는데, 월급이 나보다 몇 십만 원이 많다는 그녀가 다니는 직장이 부러워졌다. 고민 끝에 부탁을 해서 지금의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비록 정규직은 아니었지만 일만 열심히만 하면 안 짤린다는 말과 갑자기 몇 십만 원 오른 월급 때문에 격주로 반복되는 야간작업과, 매일 반복되는 잔업과 주말의 특근도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 반년 일했을 쯤, 결국 몸에 탈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팔과 다리가 쑤시는 정도였는데, 그 통증이 허리와 어깨로 넘어와서 어느 날 아침에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진 것이다. 어렵게 월차를 내고 찾아간 병원에서는 한 열흘 쯤 쉬면서 치료하지 않으면 만성적인 병이 되어서 힘들 거라고 했다.
그러나 열흘을 쉰다는 것은 상상을 하기 힘들었고, 어렵게 잔업만이라도 빼달라고 해서 겨우 치료를 했는데 보름을 넘겨서야 통증이 가라앉았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몇 번 만나본 남자 중에 맘에 드는 사람도 있었지만, 안정적인 직장이 아니라서 연락이 와도 번번이 도망치기 바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비정규직이면서도 그것을 숨겼고, 영화 한편을 보더라도 좀 더 로맨틱하게, 주말에 바람을 쐬더라도 마음 편하게, 병원 한번 가더라도 눈치 안 보게, 옷 한 벌을 사더라도 폼 나게 입고 싶고, 시골에 혼자 남은 어머님을 좀 더 자주 찾아보고 적은 용돈이라도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 비정규직 없어지는 날 왔으면 -
그러다 어느덧 서른이 되었다. 거절했지만 못내 맘에 두었던 그 남자에게 전화를 했고, 솔직해진 우리의 사랑은 더욱 빠르게 익어갔다. 그해에는 국회의원과 대통령 선거가 한꺼번에 치러졌고,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나는 비정규직과 서민을 위해 헌신해 온 정당과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마침내 정규직과 동일한 일을 하고 있거나 2년 이상 상시적인 일을 계속 해온 모든 업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법이 만들어 졌고, 그 덕에 나는 지금의 회사에 정규직사원이 되었다. 내가 투표해서 얻은 처음으로 얻은 큰 선물이었다.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도저히 믿기지 않던 그날을 나는 결코 평생토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기사작성일: 2009-07-10 (시민의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