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여당이 다시 ‘불란(佛亂)’에 휩싸였다. 내년 예산안을 날치기 처리하면서 불교계와 약속했던 템플스테이 예산을 삭감한 게 불씨다. 여권은 “착오”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불교계는 여권 인사들의 사찰 출입을 금지하는 등 강한 행동에 나섰다. 불교계에선 “다른 정부 예산도 반납하자”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유감표명을 해야 했던 정권 초 ‘종교편향’ 논란이 더욱 심화돼 재연되는 양상이다. 이 대통령의 헌법의 원칙인 정교분리, 세속주의를 무시하는 기독교 근본주의 기조와 정권 출범 후 3년 내내 쌓였던 여권과 불교계의 불신과 반목이 터진 것이라는 지적이다.
◇ 뿌리깊은 불화 = 한나라당이 약속했던 템플스테이 예산이 하루아침에 삭감되면서 불교계는 부글부글 끓고 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 등 불교단체들은 12일 기자회견을 열고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의 사퇴를 요구했다. 앞서 조계종은 지난 9일 성명을 통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규정하고 정부와 한나라당 의원들의 사찰 출입을 거부하는 현수막을 전국 주요 사찰에 내걸었다. 여권과의 대화 중단 선언이다. 조계종 총책모임인 화엄회와 법화회는 지난 10일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지원 예산 일체를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한나라당은 “예산 삭감이 기획재정부에서 이뤄졌다”며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하지만 기획재정부 예산실 관계자는 “템플스테이 예산이 여당 내에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지 몰랐다”고 밝혔다. 당초부터 여권은 템플스테이 예산에 무게를 두고 끝까지 챙기지 않았다는 의미다.
여권과 불교계의 갈등은 정권 초반부터 시작됐다. 2008년 6월 정부의 교통정보시스템에서 수도권 사찰 표기가 빠지고, 7월엔 경찰이 촛불집회 수배자를 체포하기 위해 조계종 총무원장의 승용차를 검문하면서 불교계의 반발은 고조됐다. 같은 해 8월27일 불교계는 서울시청 광장에서 ‘이명박 정부의 종교편향 행위에 항의하는 범불교도대회’를 개최했고, 이 대통령은 9월9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저의 불찰”이라며 유감을 표명했다.
이후 진정 국면에 들어선 뒤 4대강 사업을 두고 내연하던 불씨는 2009년 11월 안상수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좌파주지’ 발언으로 다시 불붙었다. 안 대표가 조계종 자승 총무원장과 만나 “강남 부자 절의 좌파주지를 그대로 놔둘 거냐”며 봉은사 명진 스님의 교체를 건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청와대와 불교계의 갈등은 지난 4월에는 이동관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 명진 스님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지난 9월에는 KTX 울산역 이름에 통도사를 병기하기로 했던 방침을 정부가 일방적으로 철회하면서 논란을 빚었다.
◇ 원인은 종교편향 = 불교계와의 갈등과 불신이 되풀이되는 발단은 소망교회 장로 출신인 이 대통령의 기독교 근본주의가 꼽힌다. 이 대통령이 2004년 서울시장 재직 때 했던 ‘서울시 봉헌’ 발언은 단적인 사례다. 집권 초기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등 소망교회 인사를 대거 중용하면서 ‘고소영’ 논란이 일었고, 이 대통령은 2008년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방한 때 조용기 목사를 청와대로 불러 기도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의 이런 성향은 주변 인사들에서도 그대로 반영됐다. 2008년 5월 주대준 당시 청와대 경호처 차장은 “모든 정부부처 복음화가 꿈”이라고 밝혔고, 정부와 서울시의 교통·지역안내 사이트에 사찰이 누락되는 상황이 되풀이됐다.
결국 이 대통령의 기독교 편향적 언행이 당·정에 영향을 미치고, 종교차별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명진 스님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문제의 근원은 현 정권의 노골적인 기독교 색채”라며 “차라리 청와대를 청와교회로 부르자”고 비판했다.
이 대통령의 정권 창출 기반인 기독교 세력의 정치화도 배경으로 지적된다. 대한성공회 김광준 신부는 “현 정부와 불교 갈등의 핵심은 뉴라이트이고, 그 핵은 기독교 우파”라며 “이 정권의 지지기반이기 때문에 문제되는 모든 부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들이 교회를 정치화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사회 현안에 대한 현 정권과 불교계의 입장차도 갈등의 배경으로 분석된다. 4대강 사업 등 정부의 핵심 정책에 반대하는 불교계가 정권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진 것이다. 실제 지난 1월엔 불교계 4대강 사업 저지 특별위원회 위원장이던 김포 용화사 주지 지관 스님이 심야에 만취한 경찰 2명에게 폭행당하기도 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4대강 사업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내온 명진 스님에 대해 “좌파 주지”라고 평가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경향 닷컴 -
작성일: 2010-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