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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12-21 14:27
정읍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다녀와서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4,987  

정읍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다녀와서

                                                                  - 허 미숙 -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눈을 떴다. 예전 같으면 겨우 일어나 떠나는 상황이었다.

2주 전부터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 답사하고 관련 서적을 읽고 자료를 찾아보았다. 이번 기행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포함해 8년을 고부 땅에서 살았고 정읍을 추천한 사람도 나였고 설명도 내가 하겠다고 자원했으니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사전 답사를 할 때도 네비게이션 없이 유적지를 다 찾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동안 동학을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하신 사람들 덕분에 이정표 안내가 잘 되어 있었지만 보고 자란 고장이기에 헤매지 않고 잘 찾을 수 있었다. 역사 기행을 참여하겠다는 사람들이 적어서 여기저기 지인들에게 연락을 했다. 이번 기행은 비정규직 역사기행에서도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지만 나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일이기에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이 같이 떠나기를 바랐다. 


고등학교 때 역사 선생님이 현재 동학 농민 혁명 계승 사업회 이사장도 겸하고 계시기에 사전 답사 때 졸업 후 처음으로 뵙고 조언을 구하고 기행 날 직접 해설과 안내를 해주시겠다는 말씀을 해 주셔서 한명이라도 더 참여시켜야 하는 의무감이 있었다. 다행히 30명 정도가 함께 하게 되어 조금 안심하고 기행전날 말씀드렸더니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관심을 갖고 함께한다는 의미가 크다면서 굉장히 좋은 기행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셔서 역시 “우리의 호프”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창시절 선생님 별명이 우리들 사이에서 “우리의 호프”였다. 


역사 기행을 떠나기 전날 진행 연습을 두 번 했다. 맘속으로 연습한건 열 번도 넘을 것이다. 115년 전의  굴곡의 역사를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안에서 30분간 한다는 것은 무리임을 알았지만 난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고 머리에만 들어있는 나의 거짓 지식을 전하기에 너무 바빠 버벅댔다. 너무 창피했다(모두가 잊어주면 좋으련만). 나의 우상 이순신 장군을 설명할 때는 그 시대 상황하며 이순신장군의 나라를 향한 절박함과 구국결심이 내 온몸을 전율케 했는데 왜 동학은 가슴으로 오지 않는단 말인가? 난 역사의 현장을 그냥 오고 갈 뿐이지 않은가? 내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아침부터 늦게 도착한 분들이 있어 20분정도 지연되고 정읍 톨게이트에서 뵙기로 한 선생님을 놓쳐서 죄송하고 진행도 매끄럽지 못했고 “아흐! 오늘은 왜 삐걱삐걱!” 하지만 이런 생각은 나의 기우! 고부면 신중리 사발통문 작성자 후손들이 성금을 모아 지은 동학혁명모의탑에서 선생님이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는 순간 난 21년전의 역사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선생님이 송씨 임씨(또 다른 성은 기억이 안 난다.)의 집성촌 마을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마을 이름을 죽산에서 주산으로 개칭 했다고 한다. 조각조각 떠다니는 산이란 의미로 일제가 그 기를 산산 조각 나게 해버리고 싶어서 바꿔 버렸나보다.(나쁜 때끼들)


사발통문 서명자의 후손이 성금을 모아서 만든 탑이기에 작고 볼품없어서 다른 답사객들은 “에게”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나도 첨에 와서 봤을 때는 같은 생각을 했다. 사전 답사 때는 사발통문을 작성했던 장소 송두호 선생의 집을 가보기로 했는데 선생님은 터만 있을 뿐이라고 무명 농민군 위령탑으로 안내를 하셨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 난지 백주년이 되는 1994년에 각계각층에서 성금을 모아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에서 건립했다고 한다. 죽창 탑, 농기구 탑, 의지에 불타오른 탑, 생명이 꺼져버린 듯 고개 숙인 탑 등 31개의 탑으로 둘레는 사발통문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동학 농민 혁명을 미완의 역사 미완의 혁명이라  말씀하시고 미완의 역사를 우리가 올바르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때 답사에 참여하신 목사님이 동학은 인간 평등을 주장하는데 “여자들은 왜 없고 어린아이도 없느냐”는 질문을 하셔서 “이것 역시 미완인 것 같다”는 말씀과 함께 참여자 모두가 웃었다. 


조병갑의 폭정으로 유명한 고부 관아 터와 고부 향교를 들렀다. “터라는 것은 예전에 그 자리였다는 것이고 지금은 정체가 없다”라는 의미라고 말씀하셨고 고부 향교를 갔다.  오늘은 운수대통한 날인가? 고부향교를 들어서는데 고등학교 때 은사님을 우연히 만났다. 물론 해설 안내하신 조광환 선생님과도 절친인 선생님을! “우연”이 더 행복하게 만든다. 선생님은 동아리 학생들과 “선비의 생활”에 대해서 촬영하신다고 했다. 후배들도 너무 예뻐 슈퍼에서 간식을 챙겨 열심히 하자 라는 말과 함께 전해주고 향교로 뛰어갔다.


몇 번 왔어도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은행나무만 보고 돌아갔는데 선생님이 고부향교의 살림을 맡고 있는 장위원님께 연락 해 놓으셔서 공자님께 제사지내는 대성전을 들어가서 귀중한 설명도 들었다.  대설위는 성균관의 명륜당이고 중설위는 고부향교라고 하니 조선시대에 고부 지역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가늠케 해준다. 선생님은 사당을 가는 길에 선으로 3길을 만들어 놨는데 중앙에 큰 길은 귀신이 다니는 신도고 큰 문 역시 귀신이 들어가는 문으로 많은 사람이 왔으니까 큰문 열어주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우리 선생님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 애쓰신다. 답사객들이 이런 선생님의 마음까지 알아주면 더 좋으련만! 향교를 나오면서 장위원님이 광주에서 방문해줘서 고맙다고 어린이들에게 아이스크림까지 사주시니 모두가 행복함 속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철없는 우리 어린이들 제일 비싼 아이스크림 하나씩 들고 나온다. 어른들에게도 음료수를 권하니 극구 사양하고 장위원님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해본다.


차안에서 약간 일정을 조정했다. 말목장터에서 점심을 먹고 백산에서 오는 길에 전봉준 장군의 고택을 들르기로 했다. 이곳 지형은 선생님이 워낙 잘 알고 계시니까 마음마저 편안하다. 속으로 “진행자가 이렇게 편안해도 되는 거야? 다 은사님 덕이지.” 하고 생각했다. ㅎ ㅎ ㅎ 이상하다. 어제 저녁도 조금 먹었고 아침도 안 먹었는데 난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았다. 존경했던 선생님께 동학농민혁명의 대해서 다시 배운다는 설레임과 기행 잘하고 마무리 잘해야 한다는 약간의 긴장감이 배고픔을 잊게 했을까? 아무튼 난 오늘 내 인생의 잊지 못할 하루를 보내고 있다.


점심시간에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를 위한 시민모임 대표님과 사무국장님 우리 선생님이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와 근로정신대 할머니를 위한 시민모임이 역사적으로 교류할 부분에 대해서 논의를 하셨다. 난 두 단체를 연결해주는 대단한 로비스트! ㅋㅋㅋㅋ 역시 난 훌륭한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사회 저명인사는 아니지만 소시민으로 살아가면서 올바른 삶을 지향하는 제자임에는 틀림없음을 확인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이 폭정을 휘두르고 더 착취할게 없을까 고민하다 정읍천과 태인천이 만나 동진강을 이루는 곳에 보를 하나 더 세워 물세를 받아낸 만석보터로 이동을 했다. 드넓은 배들 평야에 황금물결이 일렁이고 강가에는 한가로이 낚시하는 사람도 있고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물결도 일렁인다. 양성우 작가의 만석보라는 시비가 있고 만들어지게 된 유래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는데 많이 웃었다. 성난 농민군이 고부관아로 쳐들어가 곡식을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옥에 갇힌 무고한 사람들을 풀어주고 만석보로 달려가 보를 허물어버리고 백산성지에 관군과의 전투에 대비해서 진지를 구축한다.


47미터의 낮은 산에 올라 정자에 이르니 어디에서 관군이 쳐들어올지 미리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둥그렇게 둘러 앉아 준비해간 막걸리에 김치 안주를 곁들이니 박효섭이란 분이 “이 산하”란 노래를 부르겠다고 해서 모두가 경청한다. 원래부터 가슴을 울리는 노래이기는 했지만 백산성지에서 들으니 큰 감동이었다. 어린이들은 농민군과 관군으로 나뉘어 전쟁놀이를 했다고 한다. “기특한 어린이들” 우리가 역사의 현장에서 어린이 교육하나는 제대로 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과의 소중한 시간들이 점점 흘러가고 있다. 백산 창의비 앞에서 선생님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부디 예쁘게 나와서 선생님께도 드릴 수 있기를 바래본다.


이제 전봉준 장군 고택으로 간다. 기록에 출생지가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다만 고택에서 전봉준 장군이 서당을 했고 서당을 다녔다는 후손의 기록을 녹취로 가지고 계시다 했다. 답사객들을 위해 마련한 고택 잔디밭에서 전봉준 장군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주시고 어린이 답사객들은 관군과 농민군이 되어 전쟁놀이에 여념이 없다.


차안에서 선생님은 코스모스와 억새와 나락이 절묘하게 아름답단 말씀을 하셨다. 농민군이 관군과의 전쟁에서 처음으로 대승을 거두는 황토현, 갑오동학혁명탑에서 녹두장군을 두고 오래도록 내려오는 참요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라는 노래를 파랑은 청나라, 일본을 의미하고 녹두는 5척 단신의 작고 단단한 전봉준 장군을 의미하며 청포장수는 민중을 의미한다고 하셨다. 황토현 전적지는 전봉준장군 동상과 농민군의 군상이 조각돼있는데 친일작가가 만든 작품이라니 놀라울 따름이고 느낌이 전혀 안 온다. 1987년 완공됐을 때 고 김대중대통령이 야당총재 자격으로 기념사를 할 때 정부에서 5분 넘게 연설을 하지 못하게 했는데 16분을 해서 정읍군수가 자리를 내놓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짤린것이다.  참 무서운 세상이었다는 게 실감이 난다.  지금 또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이일을 어찌해야 할꼬?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에서 선생님이 높고 좁은 방으로 안내 해서 들어가 보니 온 사방이 거울로 되어 있었다. 우리 답사객들은 30명인데 천장을 올려다보니 수많은 사람이 서 있었다. 115년 전에도 이렇게 많은 농민군이 함께 하며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피 흘리며 쓰러져 갔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은 “세상을 올바르게 만들어 가려는 사람들에게 동지의식을 느낀다.”는 말씀을 하셨다. “너와 내가 아닌 더불어 사는 우리”를 가르치셨던 선생님은 한사람 한사람의 힘은 너무 약하지만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면 올바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나도 내 가족만을 위한 삶만은 살지 않겠다는 작은 결심을 했다. 선생님과 함께한 답사는 모두에게 큰 감동과 추억을 준 선물임에 틀림없다. 선생님과 함께하면서 답사객들이 처음으로 메모하는 것을 봤다. 예전부터 메모를 했는데 내가 잘못 보았나? 필기구를 준비 안한 나는 스승님의 귀중한 말씀을 머리로만 담으려고 생각한 내가 미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다음기행은 꼭 필기구를 챙겨야겠다. 이렇게라도 기행문으로 남겨 보관하게 돼서 다행이다.


나는 역시 운이 많이 따르는 사람이다. 일정이 겹쳐 아주 바쁜 상황 속에서도 제자가 동학농민혁명유적지를 답사한다고 하니 선뜻 시간 맞춰보겠다고 하셨던 선생님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며 생업 현장에서 더 열심히 살아 밝음을 비추며 애쓰고 힘쓰는 분들과 함께 올바른 역사를 위해 동참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작성일: 2009-10-12